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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된 기록 너머의 이야기
제20회 동강사진상 수상자,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김녕만 인터뷰
  • 인터뷰
  • 최고관리자
  •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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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1978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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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1980 ⓒ 김녕만


역사가 된 기록 너머의 이야기
제20회 동강사진상 수상자,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김녕만 인터뷰

누구나 기록을 남기는 시대지만 모두의 기록이 역사로 남진 않는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김녕만의 작업은 다르다. 그의 기록은 동시대를 살아온 모든 이의 삶에 대한 증명이자 곧 우리의 역사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동강국제사진제에서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김녕만은 시대의 기록을 남기며 어떤 시간을 품어왔을까. 그를 만나 사진 너머 카메라를 든 김녕만의 시간에 대해 물었다.



에디터・김진빈

사진・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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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1980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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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팔을 다쳐 투병하던 중 사진이 크게 실린 신문을 보고 막연하게 사진가의 꿈을 키웠다.



처음부터 사진 작가가 아닌 사진 기자의 꿈을 키웠던 계기가 있나?

무언가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로를 찾지 못하던 때 고향인 전북 고창에 읍성의 축성 연대를 찾는 현상공모가 붙었다. 막연히 사진 기자를 꿈꾸고 있던 터라 도전해보기로 했다. 고증을 위해 사진을 찍고 연대를 증명하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조선왕조실록부터 동국여지승람까지 기록을 찾아 헤맸다. 결국 1453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내 상금을 거머쥐었다.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소 깨닫고 상금으로 사진 공부를 하러 서울에 갔다. 사진을 배우던 중 고창 군청에 연락을 받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농촌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 사진엔 서툴렀지만 내겐 그곳에서 나고 자란이의 시선이 있었다. 작품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변화를 기록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담았다. 그때부터 기록의 의미를 알지 않았나 싶다.



1974년 학생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했고 1977년과 1978년에는 모두 최고상을 수상하는 영광이 따랐다. 그렇게 연이 돼 꿈에 그리던 동아일보 사진 기자가 됐다. 이후 어떤 시간들이 있었나?

신문은 한 번의 낙종이 영원한 낙종은 아닌 게 장점이다. 반대로 특종도 딱 그날 하루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펼쳐져 20여 년 동안 즐겁게 취재했다. 사진 기자가 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초보 기자일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 광주로 향했다. 사진 기자 물이 덜 들었던 때라 신문에 쓸 사진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아 극적인 상황뿐 아니라 주변의 아픔까지 모두 담았다. 우리 민족의 큰 비극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유리창에 총탄이 맞은 흔적이나 비통해하는 남겨진 가족까지 모든 상황을 다 기록하니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영화 찍냐고 흉을 볼 정도였다. 당시엔 계엄군의 사전검열이 있던 때라서 찍어봐야 신문에 실리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발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찍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시기에 사진 기자로 일하면서 반드시 지켰던 원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명감을 가질 것. 동아일보를 100만 명이 본다고 했을 때 신문 하나로 두 명이 나눠본다면 하루 200만 명이 내 사진으로 세상을 본다. 독자의 눈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다. 특히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얼만큼 진실에 가까운가를 계속 고민했다. 사진기자가 촬영한 장면은 사실이지만 누군가 그게 진실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학생이 서로를 때리는 상황에서 경찰을 때리는 학생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만이 진실인가? 흔하지 않은 좋은 장면을 찍었더라도 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면 신문에는 그 사진을 쓸 수 없다. 행여 독자에게 항의가 들어온다고 해도.



때로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혼란이 오기도 할 것 같다.

시대와 상황에 맞춰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동아일보라 쓰여 있는 방독면을 쓰고 있으니 시민이 와서 “지금 현장에 몇 명이 모인 것 같냐?”고 물은 적이 있다. 2천명 정도로 보이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3천 명 정도라고 말하니 눈이 삐었다면서 5천 명은 된다고 하더라. 어떤 상황, 입장에 있는지에 따라서도 같은 사실을 다르게 느낀다. 또 당시는 장발이 유행이라 머리를 짧게 깎으면 인민군 같다고 흉을 보던 시절이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취재를 나가면 항상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심을 잡는데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디까지 중심으로 생각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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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82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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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 1983 ⓒ 김녕만



장비의 발전이나 새로운 장비의 도입이 취재 현장이나 작업 방식에 불러온 변화가 있나?

신문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36장짜리 필름이 가장 많은 컷이었다. 대부분 6컷 정도 남으면 필름을 뺐다. 언제 급박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 군인이 미군을 폭행한 사건 때 필름이 떨어져 특종을 다른 기자에게 양보했던 기자도 있다. 디지털은 그런 염려가 없을 뿐더러 최근에는 장기간 해외에 다녀와도 될만큼 용량도 충분하다. 또 필름은 현상해야 결과물 확인이 가능하고 해외 출장이라도 다녀온다면 엑스레이 검열 때 결과물이 상할까 불안이 극에 달했다. 지금은 전혀 하지 않는 고민이다. 최근에는 광주 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에게 스마트폰 카메라가 있었다면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호원 10명보다 사진 기자 1명이 더 든든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사진의 힘이 대단하고 이는 장비가 발전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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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80년대 사진 기자에게 방독면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비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서울에서도 혹독한 현장 취재가 계속됐다. 이번 동강사진상 수상자전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어떤 사진으로 만날 수 있나?

시위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 외신 기자가 한국에 오면 전투 경찰이 쭉 서 있는 장면을 보고 놀라기 일쑤였다. 한국 기자들은 왜 찍을 게 천지인데 사무실에만 앉아 있냐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만큼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 됐다. 이번 전시 사진 중 시위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등쪽에 두루마리 휴지를 단 사진이 있다. 시위 현장에선 방독면이 한 번 벗겨지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이미 가스를 들이마셔 눈물 콧물을 쏙 뺀다. 경찰 뒤춤 휴지는 누군가를 위한 배려인 것이다. 또 시위 현장에서 서로 등을 댄 채 앉아 있는 사람 중 한쪽은 책을 보고 다른 한쪽은 담배를 피는 사진도 있다. 극한 상황이라고 해도 웃음이 나오면서도 깊게 생각해보면 슬픈 현실을 설명해주는 장면이 존재한다. 이것이 내 사진에 있는 유머와 해학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중에서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고 차분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진을 많이 보여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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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1991 ⓒ 김녕만



1984년부터는 판문점 출입 기자로 일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비극이 드러나는 곳에서 어떤 장면들을 마주했나?

분단이라는 비극이 세월이 흐를수록 당연시된다는 사실을 느끼며 분단이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라는 말을 더 실감했다. 판문점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국민을 대표해서 온 만큼 모든것을 기록하자 다짐했다. 그런 관점으로 보니 찍을게 너무도 많았다. 무심코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관심이 생길 정도였다. 유일하게 철책이 없는 판문점은 팽배한 긴장감이 감돌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인간미가 흐른다. 실제로 제 20회 동강국제사진제 포스터로 쓴 ‘판문점 1989’ 사진도 갑작스런 비에 한 우산 속에 남북 기자가 들어간 장면으로 외부에서 돌발상황이 생기면 남북이 같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 사진이다. 판문점 사진에 빠져 있을 그 당시에는 판문점 취재가 잡히면 미리 영화도 보고 이미 찍어 놓은 판문점 사진도 다시 펼쳐놓고 보면서 무엇을 더 찍을지 아이디어를 얻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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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85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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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87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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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89 ⓒ 김녕만



듣고 보니 사진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작품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동아일보 기자가 될 때 작품으로 상을 타서 들어간 것과 반대로 기자로 일하면서는 늘 작품을 고민했다. 취재를 하며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사진 중 하나가 평양 고위급 남북회담 때 담은 장면이다. 남북회담을 하면 군인, 기자 모두 서로 안내해주는 파트너가 있다. 평양역에서 남북 군인 장교가 같이 가방을 들고 가는 장면을 보면서 가방끈 대신 서로 실제 손을 잡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 고위급 남북회담 때 남측 대표가 북한에 가기 위해 판문점에 다시 모였다. 전날 눈이 많이 와 미끄러운 빙판길이 됐고 남북 대표가 함께 걸어가다 손을 딱 잡았다. 그 장면을 계속 생각하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뒤따라 오던 기자는 나를 보고 같은 장면을 찍으려다 빙판에 미끄러져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기회가 왔을 때 몇 초 차이로 찰나를 붙잡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 꿈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관찰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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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 김녕만

1200mm 초망원 렌즈로 휴전선 일대에서 서식하는 동식물 촬영을 하고 있는 김녕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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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 김녕만

선거유세 취재중인 김녕만 작가



김녕만의 모든 사진은 관심과 관찰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겠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임진각 안 통일촌이라는 마을에서 남북회담 취재가 있었는데 당일에 취소되면서 기자들이 철수하는 상황이었다. 한창 분단에 관심이 많을 때라서 노란 민들레꽃이 피어 있기에 동료의 매크로렌즈를 빌려 북한을 배경으로 언덕배기에 핀 노란 민들레꽃을 담았다. 임진각까지 나와서 다른 기자들이 탄 뒤차를 기다리는데 한참동안 오지 않았다. 먼저 나온 기자들은 회담이 다시 열렸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뒤늦게 온 팀이 내게 대뜸 아까 뭘 찍었냐고 물었다. 내가 찍은 꽃이 희귀종이라 착각하고 매크로렌즈를 돌려 쓰며 한 번씩 다 촬영했다는 것이다. 어떤 기자는 언덕에서 다리를 벌리고 찍다가 바지가 찢어졌다는 것. 뒤따라오던 후배들이 김선배가 찍는 걸 보니 희귀종인가 보다 하고 열심히 찍었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동료 사진 기자들과 ‘투영동인’을 결성하고 해마다 그룹사진전을 여는 활동을 통해 보도를 위한 사진이 일회성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어떤 목적을 갖고 결성돼 어떤 활동을 했나?

사진 기자 사이에는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고, 나의 행복은 너의 불행이다’라는 말이 있다. 특종은 상대적이라 내가 오늘 좋은 사진을 건졌어도 누가 더 좋은 사진을 찍었다면 특종을 빼앗긴다. 현장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계속 현장에서 보고 공동 목표로 고군분투하다 보니 현장 밖에서는 다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 사진은 일회성인데 우리가 이를 역사의 기록이 될 수 있는 무언가로 발전시키면 사진문화도 발전하지 않겠냐는 말이 오갔고 뜻이 있는 사람들과 ‘투영동인’을 결성했다. 1987년에 각 신문사에서 한 명씩 뭉쳐 1년에 한 번씩 전시를 하며 서로 격려도 하고 선의의 경쟁도 하며 많이 성장했다. ‘유머가 있는 풍경’도 내 사진 가운데 재미있는 사진을 골라 투영동인전을 하다 보니 개인전까지 하게 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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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투영동인. 왼쪽부터 세계일보 조성휘, 조선일보 구자호, 한국일보 고명진, 경향신문 우종원, 동아일보 김녕만, 중앙일보 채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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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1989 ⓒ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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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91 ⓒ 김녕만



한편 초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동강국제사진제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동강국제사진제를 통해 어떤 사진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나?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도 활동했던 전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 씨는 뒤늦게 사진을 시작해 외국을 다니며 활동했다. 일본 여행 중 히가시가와 국제사진페스티벌을 보고 와 “아주 작은 마을에서 알찬 세계 사진 축제를 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명동 선생님께서 물려주신 월간지 『사진 예술』을 함께 발행하고 있던 아내 윤세영 편집장이 관련 글을 썼고 김진선 강원도지사에게 사진축제를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강원도지사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영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강국제사진제가 시작됐다. 모든 문화는 교류에서 시작해 발전된다는 이념으로 처음부터 ‘국제’라는 타이틀을 넣고 외국 작가를 초빙해 전시하고 해외 작가상도 줬다. 이후 영월군청에 우리나라 제 1호 사진박물관인 동강사진박물관을 지었고 이제는 전 세계와 교류하는 축제로 발전했다. 한번은 동강국제사진제에서 내 사진집을 나눠준 적이 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제 21회 히가시가와 국제사진페스티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처음 의도했던 대로,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동강국제사진제를 국내외 교류의 장으로 이끌어 나가면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설 자리가 더 넓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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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2009 ⓒ 김녕만

 



2022년 2월에는 청와대 출입 기자로 활동하며 남긴 사진 기록들로 사진집 『대통령이 된 사람들』을 발행했다. 이 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

대통령의 권력무상.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 시절을 같이 보내며 검은 머리에 흰 머리가 생기고 어느 순간 완전히 하얗게 변한 모습을 계속 같은 각도에서 차례로 담았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 의기양양했던 모습과 대조적으로 떠날 때의 쓸쓸하고 허전한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청와대를 떠날 때도 즐거운 표정을 담기도 했지만 그 후 군중 속에 살다가 돌아가신 뒤 분향소에 사람들이 달아 놓은 사진을 보며 여러 감정을 느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지막 유세를 한 광화문 그 자리에서 촛불 집회가 일어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 위원장이었던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그 뒤에 대통령이 됐고, 얼마 전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까지. 이 모든 순간을 담았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니 내가 담은 대통령이 총 10명이더라.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나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역사가 됐다. 그 안에서 권력무상이라는 메시지를 찾았고 이를 엮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을 냈다.



김녕만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사실 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작가의 색이 느껴지는 일이 흔치 않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처럼 사진집 한 권을 보면 김녕만 사진이구나 하지만 각각의 사진을 보고는 이를 판별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도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남길 책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권의 사진집을 엮고 보니 어지간히 사진밖에 모르는 인생이었다. 내가 곧 사진이고 사진이 곧 나다. 나태주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삶의 기록을 전시나 사진집으로 엮어내며 ‘그간의 기록으로 이제 마당을 하나 쓸었구나’ 생각했다. 나의 마당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누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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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97 ⓒ 김녕만



결국 지난 50여 년간 담아온 사진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무엇인가?

휴머니즘.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고 그걸 한 발 물러서서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사람이 곧 희망이라고 내 사진 역시 사람이 아닌 사진은 거의 없다. 이번 동강사진상 수상자전에도 김희정 큐레이터가 사람이 없는 사진을 한 두 장 정도 넣는 걸 제안했고 한 템포 쉬어가는 의미로도 좋을것 같아 그렇게 진행했다. 이제 사람이 없는 기록을 남겨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예전에는 신문의 인쇄술이 열악해 무조건 흑백으로만 찍었고 정형화된 틀도 있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다른 분위기를 전하는 사진도 많다. 스마트폰과 디지털카메라가 보급화되면서 누구나 기록할 수 있는 시대가 되니 자연스레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진 작가 김녕만이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중 아직 사진 작업으로 담지 못한 주제가 있나?

고향 사진을 찍어 서울로 올라왔고 사진과 함께 산지 50여 년이 지났다. 그간 고향도 세월을 맞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이가 들면 어릴 적 입맛이 돌아 온다고 한다. 입맛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때와 똑같이 찍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감각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고향을 바라본다면 더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진 기자를 하다가 그 연장선상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사진 예술』을 이끌며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은 무언가를 통해 고향을 본다면 말이다.



당시 사진 기자들이 모여 작품을 전시하는 일이 흔했나?

거의 없었다. 개인은 있을지 몰라도 모임으로 만들어서 소통하며 이끌어갔던 그룹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한 6-7년 정도 하다가 모두 데스크가 되면서 자연스레 끝이났지만 이러한 행보에 자극은 받은 사람들끼리 무언가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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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만

전북 고창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부터 2001년까지 동아일보 사진 기자로 일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해 판문점, 청와대 출입 기자로 다양한 시대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담았다. 저서로는 사진집 『마음의 고향』, 『유머가 있는 풍경』, 『판문점』, 『광주 그날』,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대통령이 된 사람들』 등이 있고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에 서울시문화상, 2005년에 제 21회 히가시가와 국제사진페스티벌 해외작가상, 2022년에 제 20회 동강국제사진제 동강사진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INFO. <시간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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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회 동강국제사진제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김녕만 작가의 전시 <시간을 품다>는 오는 10월 9일까지 강원도 영월 동강사진박물관 3전시실에서 열린다. 해당 전시에서는 김녕만 작가가 지난 50여 년간 담아온 동시대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흑백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카메라 전문 잡지 ⓒ 디지털카메라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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